에드바르트 오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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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폴란드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정치범으로 수감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소련으로 피신하여 소련군에 입대, 정치 장교로 복무했다. 전후에는 폴란드 노동자당 선전부장, 카토비체 지역 당 제1서기를 거쳐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정치국 부원, 국방부 제1차관 등을 역임했다. 1956년에는 폴란드 통일 노동자당 제1서기가 되었으나, 포즈난 시위 진압 및 소련의 압력으로 인해 7개월 만에 사임했다. 이후 폴란드 국가 의회 부의장, 의장 직무대행, 폴란드 연합노동자당 서기장을 지냈으며, 1968년 반유대주의 숙청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9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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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트 오하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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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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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에드바르트 오하프 |
로마자 표기 | Edward Mieczysław Ochab |
IPA | /ˈɛdvart ˈɔxap/ |
출생일 | 1906년 8월 16일 |
출생지 | 크라쿠프, 갈리치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현재 폴란드) |
사망일 | 1989년 5월 1일 |
사망지 | 바르샤바, 폴란드 인민 공화국 |
배우자 | 라헬라 실비거 (1907–96) |
안장지 | 포옹스키 군사 묘지, 바르샤바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폴란드 공산당 (1929–1938) 폴란드 노동자당 (1942–1948) 폴란드 연합노동자당 (1948–1968) |
직책 | |
임기 시작 | 1956년 3월 20일 |
임기 종료 | 1956년 10월 21일 |
의장 |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
총리 |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
이전 |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
이후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임기 시작 | 1964년 8월 12일 |
임기 종료 | 1968년 4월 10일 |
총리 |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
제1서기 |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
이전 |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
이후 | 마리안 스피할스키 |
2. 생애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1906년 크라쿠프에서 태어나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폴란드 공산당(KPP)에 가입했다.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공산당이 탄압받자, 1933년부터 1938년까지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바르샤바에서 소련으로 피신했다.
1941년 소련군에 입대, 친소 폴란드군 1사단에서 정치 위원으로 활동했고, 1943년 폴란드 인민군으로 재편된 후 소령과 중령으로 진급했다.
1956년 3월 20일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사망 후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서기에 임명되었으나, 10월 21일 사임했다. 스탈린주의 관련 정치 경력으로,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폴란드 국가 의회 부의장을 지냈고, 1964년 8월 7일부터 5일간 의장 직무대행을 수행했다. 1968년까지 폴란드 연합노동자당 서기장으로 있다가, 당내 유대인 숙청으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했다. 1989년 5월 1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공산당 활동 (1906-1939)
1906년 크라쿠프에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야기엘론스키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29년 폴란드 공산당(KPP)에 가입하였다. 하지만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 이후 폴란드 제2공화국은 공산당을 엄중히 탄압했기에, 1933년부터 1938년까지 교도소에 정치범으로 수감되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바르샤바에서 소련으로 피신했다.오하프는 1906년 8월 16일 크라쿠프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크라쿠프 경찰청의 사무원이었다. 크라쿠프에서 초등 교육을 받은 후, 1925년 상업 아카데미에서 중등 교육을 마쳤다. 1926년부터 1927년까지 야기엘론 대학교 농업과의 협동조합 과학 고등 과정을 수료하고 졸업했다. 1925년 9월부터 비엘리치카의 협동조합 농촌 연합에서 일했으며, 1928년에는 라돔에 있는 협동조합 기업의 관리자가 되었다.
1928년 6월, 오하프는 징병되어 군사 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전복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고, 폴란드 공산주의를 표방했으며, 노동자 협동조합에서 계속 근무했다는 이유로 10월에 학교에서 석방되었다. 이후 1930년 2월까지 라돔 협동조합의 관리자로 복귀했다.
1929년 여름, 오하프는 폴란드 공산당 당원이 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다섯 번 체포되었고, 결핵으로 인한 건강상의 이유로 간헐적으로 석방되기도 했지만, 사나치아 감옥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수감되지 않은 기간에는 라돔, 크라쿠프, 카토비체, 바르샤바, 우치, 토룬, 그디니아, 브워츠와베크 등지에서 당 간부로 일했으며, 자주 이주하거나 숨어 지냈다. 그는 자글렘비에 크라쿠프스키에 (1932년), 자글렘비에 동브로프스키에 (1935년) 광부 파업과 우치에서 있었던 섬유 노동자 총파업 (1936년)을 조직하는 데 참여했다.
오하프는 "가난하고 소박한" 유대인 집안 출신의 간호사이자 동료 공산주의 활동가인 라헬라 실비거와 결혼했다. 그들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걸쳐 네 명의 딸을 두었다.
1939년 9월 7일,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접근하자 오하프가 수감되어 있던 바르샤바 감옥의 간수들이 도주했다. 동료 수감자들에 의해 석방된 그는 가르볼린으로 향했지만, 바르샤바 방어 준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수도로 돌아와 방어전에 참여했다. 9월 11일, 오하프는 노동자 방위 연대에 합류하여 도시가 항복할 때까지 제대로 무장하지 못한 부대에서 싸웠다.
당 활동을 계속하고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오하프는 소련이 통제하는 지역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수천 명의 동지들"을 만났고(비록 많은 사람들이 대숙청으로 사망했지만), 폴란드 좌파의 상황에 정통했으며 폴란드 혁명 운동의 재건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오하프 부부는 이러한 관점을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10월 2일 시에들체로 이동했고, 그곳에서 르비우로 갔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소련에서의 활동 (1939-1945)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하프는 바르샤바에서 소련으로 피신했다.1941년 소련군에 입대, 이후 친소 폴란드군 1사단(1 Warszawska Dywizja Piechoty im. Tadeusza Kościuszki)에 정치 위원으로 배속되었다. 이 부대는 1943년 폴란드 인민군(Ludowe Wojsko Polskie)으로 재편되었다. 오하프는 1943년 5월 소령, 1943년 12월 중령으로 진급했다.
1941년 6월까지 리비우에서 거주하며 일하던 오하프는 소규모 폴란드 공산주의 동조자 그룹을 조직했다. 같은 해 6월, 나치 독일 점령하 폴란드에서의 비밀 활동을 위해 귀국할 준비가 되었음을 소련 당국에 알렸다. 그러나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오하프는 붉은 군대에 자원, 보조 부대에 배속되었다. 겨울철 건강 문제로 소련 외국어 출판 기관의 폴란드 부서에서 민간 업무를 맡게 되었다. 1943년 5월, 해당 기관이 모스크바로 이전하면서 오하프는 새로 결성된 폴란드 애국자 연합에서 활동하며 행정-경제 부서를 이끌었다.
1943년 6월, 소련과 공산주의 통제하 폴란드 군대가 창설되자 오하프는 폴란드 제1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 보병사단에 입대하여 소위 계급의 정치 장교로 복무했다. 같은 해 10월, 레니노 전투에서 용맹을 떨쳐 폴란드와 소련 양국으로부터 용맹 훈장을 받았다. 1944년 여름, 중령 계급의 오하프는 이미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일원이었다.
2. 3. 전후 폴란드에서의 정치 활동 (1944-1956)
1944년 7월 루블린에서 오하프는 제1 폴란드군 사령부의 공식 전권 대사가 되었다. 9월에는 군의 정치 담당 부사령관으로 승진했다. 그는 바르샤바를 위한 군사적 투쟁과 당시 비스툴라강을 건너는 작전에 참여했다고 주장했다. 11월에 오하프는 군에서 제대하여 신생 공산주의 정부인 폴란드 민족 해방 위원회에서 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공공 행정부 차장이 되었다. 1945년 초부터 PKWN은 임시 정부로 바뀌었고, 오하프는 공공 행정부 차관이었으며, 4월에 장관으로 승진했다. 회복된 영토 (이전의 폴란드가 점령한 독일 영토)의 전권 대사로서, 1945년 6월 25일 오하프는 그곳에 여전히 남아있는 독일인에 대한 박해를 금지하고 나치 독일이 폴란드인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탄압을 가하는 것에 대한 처벌을 위협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그는 6월 말 정부가 국민 연합 임시 정부가 되면서 정부를 떠났다.이후 오하프는 사무국의 일원이었고 PPR의 선전부장(1945–1946)과 카토비체 지역 PPR 지부의 제1 서기(1946–1948)를 역임했다. 그는 1947–1948년 협동 조합 및 근로자 협회 회장, 1948–1949년 중앙 노동 조합 평의회 회장으로 협동 조합 및 근로자 활동에 복귀했다. 1948년 12월, PPR과 폴란드 사회당은 1989년까지 폴란드를 통치할 단일 PZPR이 되었다. 새로운 당에서 오하프는 정치국 부원(1948–54)이 되었다.
1949년 4월 1일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대통령은 오하프를 장군이자 국방부 제1 차관으로 임명했다. 1949년 11월 미하우 롤라-지미에르스키 장관은 폴란드계 소련 원수인 콘스탄틴 로코소프스키로 교체되었다. 1950년 1월부터 폴란드 군대의 소련화가 증가하면서 오하프는 군대의 정치 부서를 이끌었다. 6월에 로코소프스키는 그를 현역 군 복무에서 해임하고 국방부에서 그의 임무를 해제했다.
1950년–1952년에 오하프는 폴란드-소련 우호 협회의 의장을 맡았다. 그는 1950년부터 이데올로기 분야를 담당하는 중앙 위원회 서기였다. 1952년부터 그는 또한 군대의 정치 부서를 감독하는 중앙 위원회를 이끌었다.
당시와 그 후 경력에서 오하프는 자신의 견해를 급진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어조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이 1953년 9월 25일 체포되었을 때, 오하프는 당의 공식 신문인 트리부나 루두에 수석 주교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의 박해와 투옥과 관련하여 오하프는 나중에 요제프 스탈린과 라브렌티 베리야를 비에루트나 야쿠프 베르만 대신 비난했다.
1954년 3월 PZPR의 제2차 의회에서 오하프는 마침내 완전한 정치국원이 되었다. 당의 많은 사람들은 그를 "유력한 후계자"로 여겼고 1956년 3월 모스크바에서 제1 서기 비에루트가 사망했을 때 그가 인수할 준비가 되었다고 여겼다.
2. 4.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1956)
1956년 3월 20일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사망하면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니키타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제1서기는 비에루트의 장례식과 후임자 선출을 위한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6차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바르샤바에 머물렀다. 알렉산데르 자바츠키도 유력한 후보였으나, 결국 오하프가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오하프는 당내 '풀라비'와 '나톨린' 양 파벌 모두에게 타협적인 후보로 여겨졌고, 이후 더 자유주의적인 '풀라비' 그룹과 가깝다는 인식을 얻었다.1956년 6월, 오하프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메콘 지도자 회담에 참석, 폴란드의 석탄 공급 부족에 대한 비난에 맞서 대립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회담은 그의 제1서기로서의 장기적인 적합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하프의 선출은 폴란드의 탈스탈린화 과정을 가속화했다. 언론은 이전에는 금기시되던 주제들을 비판적으로 다루기 시작했고, 당은 분열되어 내분에 휩싸였다. 세임(국가 입법부)은 광범위한 사면령을 선포하여 정치범을 포함한 수감자 7만 명 중 절반을 석방했다. 스탈린주의 학대에 책임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던 많은 관료들이 해임되었고, 야쿠프 베르만도 5월 초 정치국원직에서 사임했다. 지식인, 청년(특히 학계), 중공업 노동자 등 폴란드 사회 각계각층은 동요하며 폴란드어로 ''podmiotowość''라 불리는, 자신들의 고유하고 주권적인 권리를 되찾고자 했다.
그러나 오하프의 통제는 완전하지 못했다. 1956년 6월 28일, 포즈난의 체기엘스키 공장 노동자들이 공식적인 경로로는 불만을 해소할 수 없다고 판단, 파업과 폭동을 일으켰다. 다른 노동자들과 포즈난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폭력 사태가 발생했고, 오하프는 로코소프스키 국방장관에게 군대 투입과 "반혁명" 진압을 위한 무력 사용을 허가했다. 이틀간의 전투로 수십 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고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7월 하반기에 열린 중앙위원회 제7차 총회는 포즈난 시위의 책임을 관료적, 경제적 오류에 부분적으로 돌렸다. 자유화와 민주화가 논의되었고,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마리안 스피할스키, 제논 클리슈코의 당 복귀가 결정되었다. 고무우카의 "우익 민족주의적 일탈" 혐의는 유지되었지만, 양 파벌 모두 그의 복귀를 추진했다. 1948년 고무우카를 강력히 비난했던 오하프는 개인적인 반대를 극복하고 전 PPR 수장에게 고위직을 맡기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7월 31일, 오하프와 알렉산데르 자바츠키는 정치국의 위임을 받아 고무우카와 첫 만남을 가졌고, 폴란드 라디오는 고무우카의 당 복귀 소식을 방송했다.
9월, 오하프는 요제프 치란키에비치에게 고무우카에게 적절한 직책을 제안하도록 지시했다. 치란키에비치는 자신의 총리직을 제안했으나, 고무우카는 시기상조라며 거절했다. 고무우카가 오하프를 대체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당내에서 분명해졌고, 그는 10월 12일, 15일, 17일 정치국 회의에 초청받았다.
10월 19일, 제8차 총회가 소집되었다. 대중은 폴란드 언론 에이전시를 통해 총회 날짜와 고무우카의 정치국 회의 참석 소식을 접했다. 오하프의 법안은 로만 잠브로프스키와 자바츠키의 비판을 받았고, 정치국 대다수는 로코소프스키를 제외한 9명으로 정치국을 축소하는 데 투표했다.
소련은 폴란드 지도부의 계획에 우려를 표했고, 소련 대사는 10월 17일 폴란드 지도자들에게 즉각적인 모스크바 방문을 요구하는 흐루쇼프의 "초대"를 전달했다. 오하프는 시기에 반대하며 거절했다. 소련은 10월 19일(제8차 총회 예정일) 흐루쇼프와 대표단의 바르샤바 도착을 발표했다. 10월 18일, 폴란드 정치국은 오하프, 치란키에비치, 자바츠키, 고무우카에게 공항에서 소련 대표단을 맞이하도록 지시했다.
소련군 부대는 바르샤바 방향으로 이동, 수도에서 100km 이내에서 멈췄고, 동독 부대는 경계 태세에 돌입했으며, 소련 군함 여러 척이 그단스크만에 접근했다. 오하프는 "폴란드 주권 수호"를 내세워 폴란드군과 내부 보안군에게 바르샤바 접근로에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했고, 총회와 회담 장소의 경계를 강화했다. 로코소프스키와 그에게 충성하는 부대의 의도는 불분명했다. 소련이 폴란드 방공군에 도착을 알리지 않아 폴란드 전투기가 요격에 나서는 등 위기가 고조되었다. 흐루쇼프는 군사 비행장에서 소련 장군들을 먼저 맞이한 후, 폴란드 동지들에게 주먹을 흔들며 경멸적인 발언을 했다.
제8차 총회는 잠시 중단되고, 소련과의 협상이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흐루쇼프는 정치국 변경, 로코소프스키 해임 등 "형제적 협의" 부족을 문제 삼고, 폴란드 내 반소련 세력 활동 증가를 경고하며 군사 개입을 위협했다. 오하프는 소련이 폴란드인들과 지도자 변경에 대해 협의하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오하프, 고무우카, 치란키에비치, 잠브로프스키는 소련의 이익이 위협받지 않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소련 대표단은 휴식 시간 동안 대사관으로 돌아가 로코소프스키를 데려갔다.
소련은 돌아온 후 더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흐루쇼프는 고무우카가 사회민주주의자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치란키에비치는 고무우카가 폴란드 애국심과 소련에 대한 충성을 겸비했다고 답했다. 오하프는 고무우카가 현재 상황에서 폴란드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며, 소련이 폴란드 당내 분열을 이용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폴란드 협상가들의 화해적이면서도 단호한 태도와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는 소련 지도부를 설득하여 군사적 움직임을 취소하고, 고무우카의 11월 모스크바 방문에 합의하도록 했다. 10월 20일 이른 시간, 소련 대표단은 떠났고 제8차 총회는 재개되었다.
오하프는 분열된 당이 소련에게 개입 명분을 줄 것을 우려, 고무우카의 집권에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로코소프스키 등과 연대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경력보다 폴란드의 이익을 우선시했다. 오하프는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의 뜻에 따랐지만, 고무우카를 폴란드의 구원자로 묘사하는 것은 굴욕적이라고 느꼈다. 그는 헝가리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으로부터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2. 5. 제1서기 퇴임 이후 (1956-1968)
1956년 3월 20일 볼레스와프 비에루트가 사망하자, 오하프는 그의 뒤를 이어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에 임명되었으나, 10월 21일 7개월 만에 물러났다. 스탈린주의 시절 정치적 권력을 가졌던 오하프는 1961년부터 1964년까지 폴란드 국가 의회의 부의장을 지냈고, 1964년 8월 7일부터 5일간 국가 의회 의장 직무대행을 지냈다. 이후 1968년까지 폴란드 연합노동자당 서기장으로 있었다.1956년 포즈난 봉기 이후, 오하프는 정치국 구성원으로 남았다. 그는 당 내에서 잠브로프스키와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 파벌과 가까운 것으로 여겨졌다. 1957년 5월, 폴란드 농업 집단화가 대체로 되돌려진 후, 그는 농업부 장관이 되었다. 당시 오하프는 국영 농업 협동조합 대신 개별 농부와 소규모 협회를 지지했다. 국영 국영 농장(PGR) 중 더 취약한 곳은 협동조합 단위로 전환했다. 1959년 10월, 오하프는 장관직에서 물러났지만, 농업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 자격으로 동일 분야에서 감독 역할을 계속했다.
1961년 오하프는 집단 국가 원수 기관인 국가 평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제4차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대회(1964년 6월) 이후, 그는 정치국원 자격과 중앙위원회 서기직을 유지했다. 그러나 8월에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의장이 사망하면서, 오하프가 국가 평의회 의장 직을 맡게 되었다. 그는 이제 폴란드 국가의 공식 대표로서 외국 지도자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1966년 3월, 오하프는 교황 바오로 6세가 바티칸과 폴란드 망명 정부의 외교 관계 유지로 인해 폴란드 기독교 천년 기념 축하를 위한 폴란드 방문 요청을 거절당했음을 스테판 비신스키 추기경에게 알렸다.
1968년 3월 사건은 1967년 6월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6일 전쟁 이후 시작되었다. 1967년 6월 19일, 제1서기 고무우카는 바르샤바에서 노동 조합 회의에서 연설하면서 폴란드 유대인을 제5열로 암시했다. 오하프는 해당 용어가 연설 녹취록에서 삭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삭제되었다.
바르샤바에서 널리 알려진 학생 시위는 1968년 3월 8일에 일어났다. 3월 19일, 고무우카는 또 다른 주요 텔레비전 연설을 했다. 오하프는 다른 정치국원들과 함께 연설문을 미리 검토하면서 고무우카가 "유대인 출신의 학생 청년"이라고 언급한 것에 반대했다. 그는 수백만 명의 유대인이 제2차 세계 대전 중 폴란드에서 살해되었기 때문에 유대인 청년들은 정당하게 민감하다고 주장했다.
오하프와 고무우카의 아내는 유대인이었지만, 고무우카와 달리 오하프는 반유대주의적 과잉에 대해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1967-68년 폴란드에서 추구된 정책에 항의하기 위해 그는 모든 국가 및 당직에서 사임하기로 결정하고 사실상 정치 생활에서 은퇴했다. 그는 정치국과 세임에 적절한 서한을 썼고, 고무우카, 유제프 치란키에비치, 제논 클리슈코와 마지막 대화를 나눴다. 그는 "다양한 반동적 요소들, 어제의 팔랑가와 오늘날의 고위 보호자들(당내 미에치스와프 모차르 파벌)이 조직한 반유대주의 캠페인"에 대해 썼다. 정치국은 4월 8일 그의 사임을 수락했고, 사흘 후 세임은 오하프를 대신하여 마리안 스피할스키를 국가 평의회 의장으로 임명했다. 참모총장인 보이체흐 야루젤스키 장군은 스피할스키를 국방부 장관으로 교체했다.
2. 6. 은퇴 이후 (1968-1989)
1968년, 오하프는 폴란드 연합노동자당(통일노동당) 서기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유대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당시 통일노동당 내에서 진행된 유대인 숙청으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해야 했다.[1]은퇴 후, 오하프는 공산주의 운동에 40년간 활동했던 기록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1970년 고무우카의 실각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내 세대교체를 지켜보았다. 그는 1956년에 자신이 비슷한 결정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시위 노동자들에 대한 무력 사용을 강하게 비판했다.
오하프는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새로운 지도부를 주시했다. 1971년 9월 30일, 제6차 당 대회를 앞두고 당의 ''지침''이 발표되자, 오하프는 이를 비판하는 서한을 작성했다. 이 서한은 파리의 Kultura에 ''반대하는 에드바르트 오하프''라는 제목으로 실려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는 권력자와 측근만을 섬기며 당과 국가의 관리직으로 진출하는 냉소적인 기회주의자들을 비판하고, "변질"을 막기 위한 조치를 요구했다. 내무부 규모와 예산 삭감, "개혁 불가능한 관료, 기회주의자, ONR 추종자, 반유대주의자, 민족주의자,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람들"을 해임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국회는 경쟁적으로 선출되어야 하며, 레닌주의의 원래 방식대로 기업 내 노동자 평의회 설립을 옹호하고, 전쟁 전 폴란드 공산당의 옛 동지들이 권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새로운 지도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하프와 그의 견해는 심하게 질책받았다. 오하프는 지역 당 조직에서 벌어진 분쟁에서 현재의 투자 정책이 잘못되었으며 "경제가 붕괴되어 새로운 12월을 만들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1971년 11월 13일부터 1972년 1월 19일까지 오하프와 그의 아내는 폴란드 상선을 타고 서유럽 해안과 지중해를 여행했다. 이들은 폴란드 비밀 경찰의 감시를 받았지만, 여행 비용은 정부가 부담했다.
1977년 10월, 오하프는 기에레크 제1서기 및 정치국에 보낸 서한에 서명했다. 이 서한은 지식인 및 전 당 활동가 그룹이 서명했으며, 기에레크 팀의 정치 및 경제 기록을 비판하고 근본적인 정치적 개혁과 민주화 개혁을 요구했다. 국회 및 지방 평의회에 대한 자유 선거와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협력을 촉구했다.
1979년 11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8차 대회를 앞두고 오하프는 "동지 공산주의자들에게"라는 서한을 썼다. 그는 전쟁 전 폴란드의 사건들을 언급하며, "현재 당 지도부의 대부분은 폴란드 부르주아 권력의 파시스트 조직과의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고", 사나치아 정권의 점진적인 복권과 정당화를 비판했다. 또한, 인민 민주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비방하는 "반사회주의 단체"를 비난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독립적인 노동자 운동인 미래의 연대와 자신의 "공산주의" 당에 대해 모두 불안해했다.
에드바르트 오하프는 폴란드 원탁 회담과 6월 4일 선거 사이인 1989년 5월 1일에 사망했다. 5월 8일 포바츠키 군사 묘지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스테판 옌제초프스키는 1956년 3월 흐루쇼프의 비밀 보고서를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당원들에게 배포하는 데 기여한 그의 역할을 강조했다. 옌제초프스키는 오하프가 중소 분쟁에 깊이 실망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환영했다고 말했다.
3. 수상 내역
국가 | 훈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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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인민 공화국 | |
기타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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